제4장
며칠 전에 왔을 뿐인데, 차에서 내리자 윤태하 집안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사모님.” 하고 불렀다.
서연은 그 호칭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본가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거실에는 윤태하와 윤 사모님이 함께 앉아 있었다. 윤 사모님은 윤태하를 부드럽고 자애로우면서도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은 그런 모자 관계가 몹시 부러웠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런 따스한 풍경은 이미 희미했다.
“서연아, 이리 와서 앉으렴.” 윤 사모님이 다정하게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윤 사모님을 다시 뵙고 그 부름을 듣자, 서연은 마치 어머니가 웃으며 자신을 부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마음속 슬픔을 갈무리하고 다가갔다.
윤 사모님은 윤태하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서연은 윤태하가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았지만, 윤 사모님의 시선 아래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에 앉았다.
윤 사모님은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며 기쁨에 가득 찬 눈으로 말했다.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구나. 참 잘 어울려.”
윤태하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서연은 조금 수줍게 웃었다.
“태하야, 서연이는 참 괜찮은 아이란다. 이제 네 아내이니, 잘해 줘야 해.”
윤태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윤 사모님은 다시 서연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연은 서둘러 일어나 윤 사모님의 손을 잡았다.
윤 사모님은 아주 다정하게 그녀의 팔짱을 끼고는, 이야기를 나누며 위층으로 이끌었다.
방문이 닫히자, 윤 사모님은 그녀의 손을 놓고는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랑 태하랑 같이 안 사는 거니?”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윤 사모님이 미간을 찌푸렸다. “같이 살지도 않는데 어떻게 정을 붙여?”
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을 붙이라는 게 아니라,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길 바라는 거겠지.
윤태하 집안에서 이 시점에 서둘러 짝을 찾아준 이유가 후사를 잇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속내는 뻔히 알았지만, 그녀는 나지막이 설명했다. “저는 그분이 모르는 사이에 부부가 된 거라, 아직 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셨을 거예요. 이 상태로 같이 살자고 하면, 절 더 싫어하게 될 뿐이에요.”
“걱정 마세요. 제가 노력할게요.” 서연은 윤 사모님을 달랬다. “이왕 그분과 결혼했으니, 당연히 잘 지내고 싶어요. 아이도 낳고, 완전한 가정을 이루고 싶고요.”
서연의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윤 사모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윤태하 집안의 대를 이어 주기만 한다면, 우리가 너한테 소홀히 하진 않을 거다.”
서연은 순종적으로 미소 지었다.
“오늘 밤, 너희는 본가에서 자고 가거라.” 윤 사모님은 말을 꺼내자마자 결정을 내렸다.
서연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윤 사모님은 그녀 얼굴의 난처함을 못 본 척하며 생긋 웃었다. “기회는 만들어 가는 거란다. 네가 노력해야지.”
서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미소는 한결 가벼워졌다.
윤태하가 이런安排를 따를 리가 없으니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서연은 윤태하가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윤 사모님은 사용인이 과일을 내오자, 웃으며 서연에게 건넸다. “이 과일 가지고 올라가서 태하랑 같이 먹으렴.”
서연은 과일을 받아 들고 순순히 대답했다. “네.”
계단을 오르며 서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남자의 창백하고 차가운 얼굴이 무표정하게,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여보.”
서연이 애교스럽게 불렀다.
윤태하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서연은 과일 접시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하고는 방긋 웃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과일 드세요.”
윤태하는 계단 모퉁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는 문을 활짝 열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윤태하는 그녀를 벽으로 거칠게 밀쳤다. 잘 씻긴 체리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서연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불쾌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음산하며, 위험한 기운이 풍겼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뭐야. 대체 목적이 뭐냐고.”
서연은 그가 비정상적이지 않다고 했던 말을 너무 일찍 내뱉었음을 인정했다.
그가 목을 조르는 통에 숨이 막혀 와, 그의 어깨를 다급하게 두드렸다.
윤태하는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고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애처로운 모습에 손의 힘을 풀었다.
서연은 크게 몇 번 기침을 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그녀는 과일 접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윤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도 과일 접시를 챙기는 꼴이 꼭 바보 같았다.
“어머님이 과일 많이 먹으라고 하셨어요. 몸에 좋다고.” 서연은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윤태하가 과일 접시를 받아 들자, 서연은 벽을 따라 주저앉았다. 손으로 가슴을 짚자 손바닥 아래로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하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했다.
윤태하는 방금 자신이 얼마나 심했는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자신이 너무 힘을 줬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제가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서연이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엔 어딘가 부서진 듯한 느낌이 묻어났다.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당신에게서 뭔가를 얻어낼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각서라도 쓰세요. 당신의 모든 것에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요.”
윤태하는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봤고, 그녀는 살짝 턱을 치켜든 채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묘하게 가련했다.
이번만큼은 진심처럼 보였다.
“쓸 거야.”
윤태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모든 건, 너와 아무 상관없어.”
“그럼, 당신을 연모해도 될까요?”
서연은 애타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흔들리는 눈빛, 촉촉한 눈동자에는 약간의 애틋함과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윤태하는 문득 조금 흥미가 생겼다.
방금 하서준과 헤어진 여자가, 돌아서서는 본 적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고, 이제는 마치 자신에게 깊이 빠진 듯한 질문을 던지다니.
윤태하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넌 얼굴이 몇 개야?”
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오래 못 살 남자한테 연정을 품다니, 내가 죽으면 순장이라도 할 셈인가?”
윤태하의 입은 마치 독을 머금은 듯했다.
그녀의 표정이 멍해지는 것을 보고 윤태하는 코웃음을 쳤다. “이혼하기 싫다니, 소원대로 해주지. 네 마지막 목적이 뭐든 간에, 넌 나한테 그저 이름뿐인 존재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니, 병색이 완연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압박감이 서연의 심장을 조이고 숨을 가쁘게 했다.
윤태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얕잡아보며 말했다. “네 신분,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마. 너와 윤태하 집안은, 아무 관련 없어.”
서연은 남몰래 숨을 들이마시고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 결혼은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오늘 밤은, 좀 불편하시겠네요.” 서연이 고개를 들어 물안개 낀 눈을 깜빡였다. “어머님은 우리가 같이 지내길 바라시니까요.”
윤태하는 몸을 돌렸다. “침대 빼고 어디서든 자.”
“…….”
